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문단 편집) == 오보 사건 == 이 사고는 한국 언론의 추악함을 극명하게 드러내기도 했다. 사람들이 서해훼리호 사건을 떠올릴 때 빠짐 없이 등장하는 게 바로 이 [[가짜 뉴스|오보]] 사건이다. 대표적으로 2가지. * "선장이 혼자 탈출해서 집으로 돌아간 것을 본 목격자가 있다" 나중에 시사저널 보도 [[https://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06795|살아있다던 백선장 사실은 지서장이었다]]에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해당 목격자 최모씨는 위도 지서장을 백운두 선장으로 [[착각]]했다고 한다. 해당 목격자가 장기간 출어를 나간 사이에 위도에 새로운 지서장(장아무개 경위)이 부임해 왔는데, 주민들에 따르면 이 신임 지서장이 백 선장과 많이 닮았다고 한다.[* 실제로 이 신임 지서장은 나중에 사건의 여파가 잠잠해지고 나서 백운두 선장의 사진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고 한다. '''[[도플갱어|너무 닮아서]].'''] 외모는 물론 체격과 키까지 매우 비슷하고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그날 입었던 옷차림조차 평소 백 선장이 즐겨 입고 다니던 옷과 모자와 똑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이 두 사람이 닮았다는 이야기는 위도 주민들 사이에서는 매우 유명했지만 약 2km 떨어진 식도에서 살고 있던 그는 이런 사정에 무지했다. 결국 지서장이 바뀐 것을 몰랐던 목격자는 사고 현장을 순시하던 지서장을 백 선장으로 오인했다. * "선장이 몰래 [[일본]]으로 밀항했다" ...는 것이었는데 오보였다. 심지어 검찰, 경찰도 이 오보를 믿고 수사대를 급파해 전경 3개 중대를 동원하여 위도와 식도 일대를 수색하는 한편 과실치사 혐의로 전국에 지명수배를 내릴 정도였다. 이런 오보가 왜 발생했느냐 하면 파장금 선착장에서 장지서장을 백선장으로 오인한 최 선장이 식도로 다시 돌아가 식도 주민들에게 백선장이 살아 있다고 전했고 이 말이 식도 주민들에 의해 다시 위도 주민들에게, 그리고 위도 주민과 친분 관계가 있는 전주지검 직원을 통해 검찰 관계자들에게, 다시 부안과 전주에 흩어져 취재하고 있던 [[기레기|'''언론사 기자들에게''']] 퍼져 나갔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고 당일인 10월 10일 오후부터 퍼지기 시작한 백선장 생존설은 다음날인 11일 지방석간인 <[[전북일보]]>가 사회면 1단으로 처음 전했고 그리고 또 한 방송이 오후 3시 뉴스에서 이를 보도함으로써 거의 전 언론으로 증폭되었다. 특히 <[[한겨레신문]]> 전주지역 기자 이모씨가 11일 오후 식도에서 최씨를 인터뷰한 기사가 12일 오전 한겨레에 보도된 것이 결정적이었다. 참사 발생 직후 속속 언론사 기자들이 도착하고 취재경쟁이 불붙었지만 소문을 확인하려는 경쟁도 만만치 않았으나 소문의 진원지인 식도로 건너가기에는 파도가 너무 높았고 모든 배들이 구조작업에 나가 있었기에 배편마저 없었던 와중에 이 한겨레 기자는 용케 배를 구해 식도로 건너갔고 거기서 최선장을 만나 이 이야기를 들은 게 화근이 되어버렸다. 이 보도 이후 최선장 단독 인터뷰를 낙종한 기자들 사이에서는 “이제 남은 것은 백운두 선장 인터뷰뿐이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백선장 생존설은 기정사실화되었다. 여기서 갖가지 [[정황증거]]들, 예를 들어 [[UDT]] 대원들이 침몰한 서해훼리호의 조타실을 맨 먼저 수색했으나 백선장이나 다른 선원을 발견하지 못했던 점[* 당시 조타실 내부가 한치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시야가 안 좋아 초기 발견에 실패했다고 한다.], 구명보트 한 척이 전남 영광군에서 발견된 점, 구조작업에 참여한 어선 중 한 척이 수상한 행동을 했다는 정보 등 갖가지 정황이 생존설을 그럴 듯하게 뒷받침하는 근거들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시민들의 무책임한 [[장난전화]], 허위 제보가 더해져 ‘살아있을 것’이라는 소문은 ‘살았다더라’로 바뀌고 심지어는 ‘내가 백운두다’라는 장난 전화까지 신빙성 있는 얘기로 받아들여졌다. 다만 수사팀은 며칠을 수색해도 선원들의 소재를 파악하지 못하자 위도지서의 경찰관들 사이에 조금씩 나돌기 시작했던 목격자 최선장이 목격한 사람이 장 지서장일 가능성이 있다는 설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백선장이 살아 있다는 것을 '''언론이 이미 [[기정사실]]화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은 파급력을 갖지 못했다. 최선장 진술의 타당성에 대해 조사하고 있던 검찰 수사팀은 10월 14일 재차 최선장을 방문하긴 했다. 검찰 수사관은 최선장에게 “위도 지서장을 잘 아는가?”라고 물었다. 지서장이 바뀐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던 최선장은 “물론 잘 알고 있다”고 했고 “당신이 본 사람이 그 지서장이 아닌가”라는 검찰 수사관의 질문에 당연히 펄쩍 뛰며 부인하는 바람에 수사관의 확인 노력은 무위로 돌아갔다. 확인 노력은 그걸로 끝이었다. 심지어 검찰 관계자들은 “생존 가능성이 1%라도 당시의 상황에서는 수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한때 책임 있는 검찰 간부가 '''“백선장의 생존 가능성은 98%이다”'''라고 경솔하게 공언한 것도 생존설을 기정사실화하는 데 일조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게 됐다. 최선장은 선장의 시신이 발견된 후에도 자신이 본 게 맞다고 생각했고 새로 온 지서장이 선장과 아주 닮았다는 위도 주민의 말을 듣고서야 의견을 굽혔다 한다. 결국, 시사저널의 취재 끝에 '신임 지서장 장 경위가 사고 지역으로 출동했다가 되돌아온 시간(오전 11시 30분경)이 목격자 최 선장이 백선장을 보았다는 시간과 대략 일치한다'는 사실이 드러나 왜 이런 혼란이 발생했는지가 밝혀졌다. 생존설의 진원지인 최선장의 증언에는 처음부터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예를 들어 물에 빠졌다가 나온 백선장의 옷이 전혀 물에 젖지 않았다고 한 점, 그리고 파장금항에 위도 주민들이 그렇게 많이 나와 있었는데도 최선장과 선원 두 사람 외에는 백선장을 직접 목격했다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점이다. 언론과 검찰이 이런 의심스러운 점을 지나친 채 서로 상승작용을 한 게 문제를 크게 만든 원인이었다. 조금 더 면밀하게 증언을 검토하고 사고상황을 짚어봤더라면 예단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오보는 언론의 고질적 병폐인 상업주의적 경쟁이 얼마나 많은 폐해를 가져오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901|오보이야기3 - ´서해`훼리호`백선장`생존’보도]] [[http://www.soccerline.co.kr/slboard/view.php?uid=1989543314|아래는 당시 언론 오보를 정리한 이미지]] [[파일:C2NloyA.jpg]] 위 이미지에 나와 있듯이 기자들이 도주했다고 보도한 '''선장은 사고 발생 5일 후에 무선통신실 안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이날 선장과 함께 도피 의혹을 받고 있던 갑판장과 기관장 역시 같이 시신이 발견되며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발견 위치가 통신실인 점으로 미루어 선장은 도망은커녕 끝까지 구조 요청을 시도하다가 배가 전복되며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백 선장의 사망이 알려지자 언론들은 허겁지겁 사설 등으로 사과문을 올렸지만 이미 늦었다. 유가족들은 그 며칠간 억울하게 어마어마한 욕을 먹으며 큰 상처를 받은 뒤였고, 후술할 1998년 9월 22일자 MBC <[[PD수첩]]> 보도 내용에 따르면 백 선장의 아내는 사고 두달 후 위도를 떠났으며 사고난 지 5년 후 해당 프로 제작진 측이 몇 차례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그때의 상처 탓에 거절했다. 덕분에 이 서해훼리호 오보 사건은 시간이 지난 후에도 두고두고 회자되는 대한민국 최악의 오보 사건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당시 유족들이 선장의 시신이 발견된 뒤 찾아온 기자들에게 '''"당신들이 살아있다고 했으니, 이제 우리 아버지를 살려내시오."'''라고 언론 오보를 꾸짖었고 '바른 언론을 위한 시민연합'은 1994년 10월 10일 1주기 때 연 심포지엄 '백 선장 생존설 오보, 한국 언론의 문제'에서 이 보도가 나온 날을 '언치일'로 선언했다. 당시 '''메이저 신문 중 예외적으로 [[중앙일보]]가''' 선장 생존설을 입수해 위도 현지에서 추적 취재를 벌인 후 [[https://www.joongang.co.kr/article/2837464|'''생존설을 반박했다.''']][* 1995년에 편찬된 <중앙일보 삼십년사> p306에도 해당 비화가 나온다.] 마이너 언론 중에서는 [[내일신문]]만이 생존해 있는 것으로 의심되는 해당 인물이 선장이 아닌 위도 지서장이라는 것을 밝혀내 주목을 받았다. 이 사건은 전술한 [[MBC]] 1993년 12월 14일 방영분에서 보도되었고 1998년 9월 22일 '오보, 그 진실을 밝힌다!' 편에서도 후속 형식으로 같이 다뤘다. 2012년 3월 29일 [[XTM]] [[M16(TV 프로그램)|남자공감랭크쇼 M16]]의 '대한민국을 뒤흔든 오보 사건'이라는 주제의 차트에서 12위에 선정되었다. 한편 언론의 오보를 곧이곧대로 믿고 선장의 행방을 추적하던 검찰, 경찰[* 다만 검찰과 경찰은 팩트 체크를 정확히 하고 수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확실하지도 않은 목격자 증언 하나에 선장을 악마로 만든 건 큰 잘못이다. 이게 단순히 검찰과 경찰의 무능으로도 볼 수 있지만 또 다른 시각으로는 서해훼리호는 애초에 정부의 무능한 대처, 증편을 요구했는데도 증편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쌓이고 쌓여서 일어난 사고인데 선장 한 명을 악마로 만듦으로써 이 모든 것을 덮을 수 있다는 생각에 모든 여론을 선장 쪽으로 돌렸다는 측면도 있다. 말 그대로 여론을 돌릴 희생양이 필요했는데, 때마침 선장이란 희생양이 생기니 그냥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도록 모든 수사를 선장 쪽으로 했다는 것.] 역시 톡톡히 망신을 당해야 했다. 또한 2014년에 방영된 SBS 드라마 <[[피노키오(드라마)|피노키오]]>의 모티브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가 있었음에도 한국 언론의 추악함은 달라진 게 없다. 2011년 [[아시아나항공 991편 추락 사고]]에서도, 같은 선박사고인 2014년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2019년 [[헝가리 유람선 침몰 사고]]에서도 여전했다. 일본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1985년에 있었던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의 기장이었던 타카하마 마사미(高濱 雅己)의 생존설이다. 오보는 아니지만 추락 당시 시신이 발견되지 않아[* 기장의 시신은 아예 불타 버려 유전자 감식 자체가 불가능한 상태였고 그나마 치열이 확인되는 아래턱뼈로 신원이 겨우 확인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기장이 도망쳤다고 생각해 기장의 유가족을 '''15년 동안''' 비난한 일이 있었다.[* 당시 사람들이 기장의 가족에게 '''519명을 죽여 놓고 뻔뻔하게 잘도 살아남았다'''는 비난을 했다고 한다.] 2000년에 당시 상황이 기록된 녹음본이 알려지면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인정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